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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와 동아의 소용돌이 ( 케네디 서거 60주년에 붙여 )
 김영식    | 2023·12·01 14:36 | VOTE : 38 |
케네디와 동아의 소용돌이 ( 케네디 서거 60주년에 붙여 )

어제로 죤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서거 60 주년을 맞았다. 무엇 때문에 내가 미국 대통령의 서거를 맞아 이런 글을 쓰게 되었는지 자문을 하고픈 생각도 없이 이 글을 쓰고자 pc 앞에 앉았다.
60년대 초의 내 주위의 내 친구들, 주로 서울 주위에서 커가고 있었던 고등학생들에게 Kennedy 대통령은 거의 불패에 가까운 신화적 인물이었다. 지금과 같은 여론 조사가 있었다면 거의 8-90%의 지지율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 60년대 초에 우리는 어떤 환상에 빠져 있었다. 국가를 되찾고 독립한지 2년이 못된 상태에서 우리는 6,25 동란을 겪었다. 국가를 되찾은 기쁨에 우리는 어떤 고생도 달게 받아 낼 수 있었고, 어떤 노력도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국민 ( 초등 )학교에서부터 콩나물 시루 같은 환경에서 자라면서 각자의 경쟁력을 키워야 했다. 잘 입지도, 먹지도 못하면서도 우리는 씩씩하게 올바르게 커야만 했다.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조밀한 나라에서 자기의 자리를 확보하면서 경쟁적으로 성장해 나왔다.
이 성장 속에서 우리는 민주 혁명과 군사 쿠데타를 후진국의 예식처럼 치루었다.
후진국이라는 닉네임을 떨쳐 보려는 우리의 요구는 나와 같이 해방둥이로 큰 우리들에게는 거의 절규에 가까운 것이었다.
우리의 현실과 이상은 케네디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만남이 보여주는 교차에서 나타나는 우리의 느낌을 희화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었다,

케네디의 의미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한 “What can you do for your country “ 는 우리에게 하는 말 같이 들릴 정도로 우리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문하게 하였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면서 우리를 이끈다면 우리는 지옥이라도 갈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
케네디대통령이 강조했던 Frontier Spirit 과 평화 봉사단은 한국 청년들에게 모험심과 투쟁심을 불러 넣어 주었고, 한국 청년들에게 의무 되어진 3-4년의 병역 의무는 국가 봉사에 대한 강한 정신을 길러 주었다. 우리는 나라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서 독일과 월남, 중동 등에 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민주당 하원의원이면서도 케네디는 2차 대전 직 후에 일어난 중국과 미국에 일어난 “비극적( tragic )” 사태에 대해 그 당시에 미국이 처했던 궁지 ( predicament )에 대한 책임을 가려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 Remarks of Representative John F, Kennedy at the Philip J. Durkin Testimonial Dinner, Salem, Massachusetts, January 30, 1949 )
2차 대전이 끝 난 후 중국에서 일어난 변화를 설명하면서 Kennedy 의원은 이 글에서 George C. Marshall 을 4번을 언급하였다. 우선 케네디는 그 당시의 미국의 Hull 국무장관이 1941년 11월 22알 일본의 노무라 대사에게 준 최후 통첩을 언급하면서, 1) 일본정부의 군사력, 해-공군력의 중국, 인도지나에서의 철수, 2) 미-일은 자유 중국 국민당 정부 이외의 정부에 정치, 군사, 경재적 지원을 하지않을 것 등을 선언하였다.
케네디가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미국정부의 극동 정책의 근본적 목표가 중국의 독립과 국민당 정부의 안정에 있었다는 것을 선언했다는 것에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지적한 것과 달리 미국의 이 정책이 일본의 진주만 공격의 직접적 원인으로 보고 있었고, 중국의 독립 유지 등을 위해  일본과 전투를 했을 수도 있었다고 보았다.
1943년 에 카이로 선언에서 절정에 달했던 이 정책은 전쟁 후 일본으로부터 중국을 해방시키고, 만주 등 일본의 장악하에 있었던 지역을 되돌려 주는 데 목적이 있었으나, 이때부터 이 정책은 혼란에 빠졌고, 흔들리기 시작하였다.고 케네디는 지적하고 있다.
첫번째 언급은 1945년 Yalta 회담에서 병들은 Roosevelt 가 Marshall 의 건의로 쿠릴열도,를 포함하여 중국의 전략적 항구 Port Arthur, Dairen 등을 소련에게 양도하였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Roosevelt 와 Marshall 이 이 책임을 져야 하며, 이것은 미국이 중국의 독립적 권위를 희생시다는 데에서 그 책임을 말한 것이며, 이것이 극동에서의 당시의 비극적 상황의 기반이 되었다고 케네디는 보았던 것이다.
소련군이 만주로부터 철수 하였을 때, 그들은 중국 공산군이 이 지역을 장악하도록 하였고, 일본군이 남긴 막대한 전쟁 물자를 이들이 소유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케네디는 Patrick Hurley의 말을 인용하여, 당시의 미국 외교관 들이 중국 공산군애개 “국민당 정부의 붕괴를 막으려는 노력은 미국 의 정책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전문 외교관들은 미국의 이런 임무를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고, 중경에 있는 미국 대사관, 미 국무성의 중국 담당 극동 부서들이 이런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고 Hurley는 언급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국 정부의 혼란 속에서 당시 대통령 Truman 은 Marshall을 중국 내.에[서 타협을 하여 연립 정부 ( 국공 합작 )를 가져오도록 하려는 취지에서 특별대표로 보내게 되었다.  Bullitt 대사는 그 당시에 Life 紙에 실은 글에서 “ Marshall 은 1946년 초여름에 장개석 정부에 공산주의자들을 받아 들이 도록 강요하기 위하여, 국무성을 통해 중국에게 탄약을 보내지 말도록 하였다”고 하면서 실제로 1946년 여름부터 1948년 2월 까지 탄약을 공급하지 않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뿐 아니라 Bullitt 대사는 미국이 중국 공군에게 비행기를 지원하도록 계약이 되어 있었으나 1946년 9월 부터 1948년 3월 까지 거의 3년 동안 전투기나 폭격기가 지원되지 않았고  예산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었고, 심지어 Marshall 은 1948년 2월 하원 외교 위원회에서 사실상 이러한 상황은 군사적 공급에서 Embargo 와 같은 것이었다고 자백하고 있었다고 케네디는 언급하고 있었다.
1948년 11월 20일 상원에서 특별 사절로 중국에 보냈던 D.Worth Clark 은 그 보고서에서 “ 지금과 같은 소량의 원조는 공산주의에 의해 몰락해 가는 중국을 구할 수 없다” 고 지적하고 있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몰락을 몇 달 앞두고, 11월 25일 New York Times 는 Marshall 국무장관이 이 상황에서 미국이 중국 정부에게 무슨 지원을 할 수 있는 가를 고려하고 있다고 언급한 것을 보도하고 있었다. 12월 21일 이 신문은 Truman 이 7000만 $의 중국 지원 동결을 보도하고 있었다.  
케네디는 자유 중국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국민당정부와 장개석에 대해 미국의 국무성과 대통령은 경멸은 아니더라도 무관심으로 대했고 이것으로 자유 중국의 비극적 결론으로 이어졌다고 하면서 미국의 대중 정책을 “소용돌이”로 표현하고 있었다.
국공 합작이 없이는 원조도 없다는 고집은 국민당 정부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고, 비 공산적 중국에 대한 중요성은 국민당 정부의 부패 논란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이 소련으로 부터 명령을 받지 않았다 든가, 그들이 단지 진보적인 농민 운동가 들이었다는 주장이 아직 계속 되고 있었다는 것은 의미없는 말로 남게 되었다.
본인이 80년대 에 한국 국제정치 논총, Korea and World Affairs 등에 실은 논문들은 위와 동일한 입장에서 미국의 정책을 평가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케네디의 狙擊과 미국의 衰落
케네디의 저격 현장은 처참했다. 대통령이 저격당하였다는 사실이 그렇다기 보다는 적어도, 아직 다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세 방향에서 총격이 이루어 졌고, 전면에서 총격을 받고 머리 뒤쪽으로 빠져나간 총알은 거의 오렌지 만한 구멍을 내고 있어서 얼굴 형대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의 상태였다는 기록이 있었다. 또한 저격자들이 모두 저격당해 살해되었다는 것이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없게 보는 요인이 될 수도 있었다. ( The Future of Freedom Foundation 기록 참조 )
케네디 대통령은 현지 시각 12:30 분에 모터케이드에 승차하였고, 1:00에 사망이 확인되었다.  
Wikipedia 의 Kennedy 저격 관련 글은 이 저격을 Kennedy 의 등 뒤로 부터 날아와 목을 거쳐 머리로 빠져 나온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 FFF 는 이 저격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발표를 요구하고 있으나, 지금까지 조사된 것에 대한 발표도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 이와 관련된 글을 쓴 Jacob Hornberger 는 Kennedy 의 저격과 관련된 활동을 위해 1987년 The Future of Freedom Foundation 을  설립하고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 는 Kennedy 의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세가지 측면에서 보고 있었는데, 그 하나는 현재의 産-軍 複合體의 예산과 관련하여, 둘째는 현재 미국이 빠져 있는 일상적인 대외 정책의 위기, 그리고 세째는 국가 안보 체제가 휘두르고 행사하는 전체주의적이고 부정적인 대국들의 힘 등이 순수하게 자유로운 사회와 조화 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이다.
미국 의회는 최근에 군부에게 8390억 $의 예산을 승인히였는데 이것은 대통령이 요구한 것보다 수십억이 더 많은 것이고, 이것이 모두 국민이 지불한 세금이라는 것이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 외교 정책 위기와 혼란을 보면, 페르시아 만 전쟁, 이라크에 대한 제재, 테러에 대한 반격, 이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코소보 리비아, 시리아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과 점령, 그리고 다시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제재와 공격등  이것은 케네디가 죽지 않았으면 일어 나지 않을 일이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JFK’s War Against Military Industrial Complex, Aug. 8, 2022 )
1963년 6월 American University 에서의 평화 연설에서  Kennedy 는 냉전을 종식시키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과의 평화적 관계를 이룩하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갈 것을 선언했고, 이것은 미국의 대외 정책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가 라는 주제로 James DiEugenio 의 글에서 다루어 지고 있었다. ( Aug 8, 2022 )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은 John F Kennedy 대통령이 월남전의 확대에 반대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Kennedy 사망 이후 죤슨대통령, 군부, 그리고 CIA 가 케네디의 정책을 뒤집고, 월남전에의 참전이 이루어 진 후 Military-Indusrtrial- Complex 가 다시 정책을 장악한 후 어느 대통령도 이것을 다시 장악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 DiEugenio 의 주장이다.
그는 Kennedy 가 1964년 에 재선을 할 수  있었고, 1968년 까지 집권 했다면 미국은 이 핵 전쟁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소련 공산권의 몰락은 Detente 관계의 수립 이후 리이간 대통령의 집권을 거쳐 또 다른 30여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 졌다.
오늘의 국제정세는 3차 대전을 언급할 만큼 주요 강대국들의 첨예한 이익 추구의 대립으로 세계 각지에서 무력 분쟁이 폭발 되고 있고, 특히 동 아시아에서는 미국, 중국, 러시아의 핵 무기를 동원한 엄청난 첨단 군사력이 그 폭발을 대기하면서 경쟁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군사력에 대한 통제나  날카롭게 대치되는 국제 정치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에서 확실한 정책이나 방법을 생각할 능력있는 지도자나 국가가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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