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날--암보셀리 국립공원(Amboseli National Park)
미처 아침 햇살이 퍼지기도 전에 우리는 조반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어제처럼 짐을 싣고, 출근 차량으로 붐비는 나이로비 시를 뒤로하고 드넓은 초원을 향해 사파리 밴에 올랐다. 시내를 벗어나 4차선 고속도로를 10분쯤 달리면 2차선 도로가 되고, 그 길을 1 시간가량 가다보면, 비포장 도로 양옆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광야가 펼쳐진다.
인간의 손길이 스치지 않은 오염되지 않은 땅이다. 풀이며 나무는 물론 초원을 유유히 노니는 동물 또한 자연 그대로이다. 아프리카에 도착하여 지금까지 본 것이 서구화 된, 아니 백인화 된 아프리카였다면 이제부터 보이는 모든 것이 아프리카의 진수임이 분명할 것이라는 기대가 용솟음친다.
끝없이 이어진 도로 요소요소에 화장실을 겸한 토산품점이 있다. 나무로 얼기설기 지은 건물 외벽에 걸려 있는 각가지 수공예품의 화려한 색과 아프리카 고유의 조각품이 보여주는 이국적 풍경은 목적지를 향한 분주한 여행객의 눈길을 잡기에 충분하다. 이런 가게를 앞으로 수없이 만날 터인데도 처음 보는 그들 고유의 공예품에 현혹된 일행은 물건 흥정에 여념이 없다. 흑단(Ebony), 마호가니(Mahogany), 장미목(Rosewood)으로 조각된 원주민의 흉상과 동물들, 돌이 부드럽고 연해 소프스톤(Soapstones)이라 불리는 돌로 된 조각품, 가늘고 긴 마사이족 여인의 목에 어울릴 십여 줄이 넘는 구슬 목걸이와 팔찌 같은 장신구, 그들 고유의 생활풍속을 그린 바딕 제품 등, 원색의 아프리카 토산품은 작열하는 태양만큼이나 화려했으며, 사실을 극대화하여 재해석한 형상은 거친 듯 하면서도 그 터치는 섬세했다. 피카소가 입체파라는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게 된 동기가 바로 이것 아프리카 미술인 프리미티브 아트에서 연유했다는 해석이 거짓이 아닌 듯했다.
첫 번째 도착한 토산품 점 구경이 끝나고 다시 차에 올랐다. 우리의 기사 마르코는 서서 밖을 볼 수 있으며,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차의 지붕을 열어 올려놓았다. 이제부터 명실상부한 카메라 사파리가 시작되는 셈이다. 텔레비전 프로, 동물의 왕국에서 싫도록 보아온 얼룩말, 기린, 타조는 물론 가젤, 임팔라 등이 멀리 또 가까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람들 모두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에 바쁘다. 보다 그럴 듯한 그림을 잡기 위해 망원렌즈를 단 카메라, 새로이 선보이기 시작한 디지털 카메라, 캠코더, 등 마치 사진 찍기 대회가 벌어진 것 같다.
마르코가 지금 보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며 앞으로 볼 ‘아프리카 빅 5’ 이야기를 하며 필름을 아끼라는 충고를 한다. 정말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한 시간 이상 계속되는 초식동물의 행렬은 곧 시들해지고 말았다. 가도 가도 끝없는 초원 그리고 가젤, 임팔라, 기린, 얼룩말, 타조 등 등. 지붕이 열려 있어 바람이 들어와 시원하지만 그만큼 비포장도로의 흙먼지가 날려 와 목구멍이 따가웠다. 울퉁불퉁한 길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시속 60Km 정도로 달리는 차 속에서 깜빡 졸다 다시 밖을 내다보면 그 풍경이 그 풍경이다.
길고 굵은 등걸에 올라앉은 무성한 잎이 마치 테이블처럼 보이기도 하고 우산처럼 보이기도 하는 아프리카 아카시아 일명 테이블 트리라고도 하고 엄브렐라 트리라고도 한단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목이 되어 있는 선인장, 그리고 푸른 초원의 동물들. 그 장대한 풍광이 끝없이 이어질수록 인간인 나는 갈수록 작아지기만 했다.
쉬지 않고 출렁이는 차 속에서 졸고, 보고, 달리다 멈추어 토산품 점에 들러 물건 구경하고, 흥정하고, 하나 사고, 그렇게 나이로비에서 남쪽으로 4시간동안 250Km를 달려 암보셀리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킬리만자로가 가장 잘 보인다는 곳, 케냐에서 동물이 제일 많다는 곳, 암보셀리 국립공원. 탄자니아와 케냐의 국경지역 킬리만자로 발치 해발 1,200m에 위치한 암보셀리는 마사이족 영토에 속한다. 입구 우측 구름 사이 어딘가에 킬리만자로가 있단다. 전설 같은 킬리만자로,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 5,898m의 영봉(靈峰) 킬리만자로. 다섯 번 와야 그 장대한 모습을 한 번 볼까말까 하다는 영산(靈山) 킬리만자로. 마사이족은 ‘신의 집’이란 뜻의 ‘누가에 누가이’라 부른다고 한다.
입구에서 간단한 수속을 하는 동안 킬리만자로의 위용을 찾아 두리번거렸으나 보이는 것은 구름뿐이다. 관광객을 맞은 현지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갖가지 토산품을 내밀며 물건을 사란다. ‘십 달라. 십 달라.’ 그들은 어디서 우리나라 말을 배웠을까. 눈이 부시도록 붉은 상의를 걸친 남자 하나가 두툼한 입술을 실룩이며 흑단으로 된 코끼리 한 마리를 내밀며 ‘니 십 달라’라며 눈을 찡끗거린다. ‘야 내가 너 한데 십 줄려고 여기 온 줄 아니?’ 차 안에는 웃음이 낭자하다. 그는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더욱 열심히 ‘니 십 달라’를 외친다. ‘십 달라’라는 말 하나로 배를 잡고 웃는 사이 암보셀리 국립공원 입장 수속이 끝났다.
수속을 마치고 다시 십여 분 달려 킬리만자로가 가장 잘 보인다는 곳에 위치한 암보셀리 롯지에 도착했다. 혹여 오늘은 얼굴을 내밀어 먼 곳에서 온 이 이방인을 맞아주지는 않을까. 기대에 부푼 가슴을 보듬으며 영산 킬리만자로를 찾아 멀리 눈길을 둔다. 방 배정을 하는 동안 킬리만자로를 향해 넋을 잃은 채 시선을 고정시켰다. 구름보다 더 하얀 만년설을 이고 있는 봉우리가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이 무슨 복이란 말인가. 초행길에 그 위용을 볼 수 있다니. 감사, 또 감사. 황송, 또 황송.
‘노을에 물든 아름다운 킬리만자로를 보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가이드의 독촉이 아니더라도 이제 그만 양치질을 하고 얼굴도 씻고, 또 밥을 먹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더 이상 억누를 수가 없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데 제아무리 킬리만자로라 해도 식후경임에 틀림없었다. 신비롭기만 하던 그 위용은 어느새 구름 사이로 사라졌다. 우리에게 식사할 시간을 주려는 배려일까.
누런 흙먼지를 뒤집어쓴 짐을 챙겨들고 배정된 롯지로 갔다. 방갈로 형태로 되어 있는 그곳 통나무집은 두 팀이 묵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멀리 자연을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길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있는 입구의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디다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는 방이 손님을 반긴다. 레이스처럼 고운 하얀 모기장이 드리운 트윈 베드와 조그만 책상 하나가 있는 커다란 침실, 화장실을 겸한 욕실. 전화는 없으나, 전기는 들어오는 원시의 초원에 있는 문명의 공간이다.
출렁대는 차량에서 누런 먼지를 뒤집어쓴 몸을 물로 씻어냈다. 연수기를 사용했다는 물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입구에 있는 의자에 나와 앉아 롯지 내 풍경을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지나쳐온 초원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다. 우람한 선인장, 이름을 알 수 없는 원색의 아름다운 꽃들, 그 사이로 원숭이들이 노닐고, 멀리 가젤이 풀을 뜯는다. 그 모든 것과 내가 하나가 되어 있는 일체감을 떨칠 수가 없다. 평화, 순수, 그리고 자유라는 단어들이 떠오른다. 진정한 자유가 평화이며, 그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거짓 없는 순수함임을 새삼 깨닫는다. 나는 이 불변의 진실을 보고 느끼고 다시 깨닫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이곳에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물건은 카메라와 물이다. 수십 통의 필름과 물, 그리고 간단한 간식거리를 배낭에 넣어 걸머지고 간편한 옷차림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밤이 되면 기온이 내려가 다소 추위를 느낄 수 있으므로 파카나 사파리 재킷이라 부르는 덧옷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오후 2시에 시작된 점심은 부폐 식. 어떻게 이 먼 곳까지 음식재료를 운송해 왔을까. 그 메뉴가 참으로 다양하다. 스프와 각종 빵, 종류도 다양한 신선한 야채샐러드, 닭과 소고기를 비롯한 육류, 오렌지, 파인애플, 구아버 같은 열대 과일은 물론 수박까지, 젤리와 머핀, 초콜릿 무스 등 디저트도 가지가지다. 테이블마다 와인이 놓이고 풍부한 음식에 일행은 그 길고 험한 여정의 피로도 잊은 채 식사시간을 즐겼다. 음식 맛도 서울 일류 호텔을 능가한다. 사파리를 즐기는 유럽 부호들을 주 고객으로 삼기 때문에 음식의 종류와 맛, 그리고 롯지의 시설이 성패를 좌우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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